다행이다

Posted 2008년 03월 20일 11시 22분, Filed under: 일상

박기도군은 얌전한  학생이었다. 겉모습은 다소 건들거려 보였어도 알고보니 얌전한 학생이었다. 술 담배야 남들 하는 만큼 한다지만 그 흔한 클럽·나이트 한번 안 가봤고 연애 경험조차 전무했던, 내 손이 등에 살짝 스치기만 해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고 그래서 처음 몇 달은 간지러워 팔짱도 제대로 끼지 못했던, 완전무결한 원시림 같은.
취직을 하자 박기도군은 얌전한 회사원이 되었다. 일주일에 한두 번 회식 자리에서 남들 노는 만큼은 놀지만, 어쩌다 남자들끼리 '좋은 데'라도 갈라손 치면 슬그머니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오는 얌전한 회사원. 딱 한 번 상사의 손에 억지로 이끌려 도우미가 나오는 노래방에 가서는 노래도 못하고 꼿꼿하게 앉아서 진땀만 빼고 왔다면서도 내 앞에선 미안해 고개를 들지 못하던, 그러면서도 수치심에 몸둘 바를 몰라하던 착한 박기도군.

아침에 일어났을 때, 집을 나설 때, 회사에 도착했을 때, 퇴근할 때 꼬박꼬박 전화를 하고, 늦으면 늦는다 회식이 있는 날이면 회식이 있다 내게 알려주고, 새벽 1시든 2시든 귀가할 땐 전화를 걸어 이제 집에 들어간다고 나를 안심시켜주던 박기도군이, 지난 밤에는 단 한 통의 전화도 하지 않았다.

밤 11시, 일이 많아 바쁜가보다 했다. 12시, 상사들에게 붙들려 술을 마시고 있겠거니 했다. 1시, 내가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는다. 다시 걸었다. 받지 않는다. 어디 시끄러운 곳에서 좀 취해 있겠거니 했다.
2시가 넘었다. 여전히 연락이 없다. 다시 전화를 걸어보았다. 받지 않는다. 또 걸었다. 받지 않는다. 단단히 취했겠거니 했다.
3시가 넘었다. 전화를 걸었다. 여전히 받지 않는다. 집에 들어갔으면서도 너무 취해 받지 못하는 걸까 생각하고 집으로 전화를 걸어보았다. 받지 않는다. 언젠가처럼 회사 근처 여관에서 자고 있겠거니 했다. 그러고도 안심이 되지 않아 4시, 5시, 6시가 넘을 때마다 집으로 휴대폰으로 한번씩 전화를 걸어보았다. 받지 않는다. 그래, 술에 취해 깊이 잠이 든 거라고 생각했다.
7시가 넘었다. 날이 밝아온다. 슬슬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해야 하는 시간이다. 전화를 여러 번 걸었다. 모두 받지 않는다. 아무리 취했어도, 늦게 잠들었어도 그 시각이면 반사적으로 눈을 뜨던 박기도군이.

밤새 애써 부인했던 무서운 일들이 머릿속에서 하나씩 재현되기 시작했다.
외간 여자와 눈이 맞아 어디 여관에 들어앉아 있으면서 내 전화를 일부러 못 본체 하는 걸까? 아닐 거다. 이건 여러 가지 케이스 중에서도 가장 발생 확률이 낮은 것 중 하나다. 1분 넘게 신호가 계속 가는 걸로 봐서는 휴대폰을 도둑맞은 것도 아니다. 도둑이 훔쳤다면 전원을 꺼버렸을 테니까. 단순 분실이라면 나에게 알려줬겠지. 혹시 돌아오는 길에 사고를 당한 건 아닐까? 목격자가 있었고 사고처리가 되었다면 밤새도록 줄기차게 울려대는 전화를 누가 됐든 받았어야 했다. 그럼 혹시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봉변을 당했을까?
최근 신문지상을 뒤덮은 끔찍한 사건사고들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눈앞이 깜깜해졌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방정맞은 상상력은 어느새 험하게 나뒹구는 박기도군의 모습을, 그 앞에서 오열하는 나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었다. 7시 30분, 여전히 그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옷을 대충 주워입고 나설 채비를 했다. 일단 박기도군의 집에 가보고, 집에 없으면 집 주위를 찾아보고, 거기에도 없으면 지하철역, 거기에도 없으면 회사와 그 근처, 또 어디를 찾아봐야 하지? 9시가 되면 박기도군의 회사에 전화를 해보고 그래도 연락이 닿지 않는다면 실종신고를 할 생각이었다. 채비를 하는 동안에도 휴대폰으로 계속 전화를 걸었다. 여전히 받지 않는다. 7시 40분, 집을 나서기 전 마지막으로 한번 더 전화를 걸어보았다.

여보세요.

박기도군의 졸린 목소리. 과장님들이랑 술 마시고 회사 근처 사우나에서 잤단다. 12시 30분 쯤 술자리는 파했는데 많이 취해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단다. 밤새 걱정하며 잠 한 숨 못자고 급기야 흉측한 상상까지 해가며 까칠한 몰골로 부랴부랴 옷을 주워입은 내 꼴이 갑자기 우스워졌다. 화가 났다. 눈물이 났다.

그러고는 나도 모르게 마음 속에 떠오른 한 마디.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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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03월 20일 11시 22분 2008년 03월 20일 11시 2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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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BlogIcon 현영 2008년 03월 20일 11시 45분 Delete Reply

    언니~ 험한 세상이긴 하지만 상상력 조금만 줄여요~ㅋ

    1. Re: # 은영 2008년 03월 20일 11시 53분 Delete

      그것이 내 맘대로 조절이 안 되걸랑.
      다시 읽어보니 내가 좀 많이 오버한 것 같기도 하고.
      그치만 설마 설마 아닐거야 하면서도 왜 그리 불안하던지.

      아침부터 내내 이적의 다행이다 듣고 있어. ㅋ

  2. # BlogIcon silverline 2008년 03월 20일 13시 51분 Delete Reply

    이적의 '다행이다' 너무 좋아라 하는 노랩니다. 쿨럭~

    1. Re: # 은영 2008년 03월 20일 15시 24분 Delete

      다행이다, 들을 수록 가슴 찡한 노래에요.
      다행이다, 라는 그 말도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

  3. # BlogIcon 앙증맞은 너구리양 2008년 03월 21일 09시 00분 Delete Reply

    그냥 믿는게 젤 좋은듯해요..... 상상의 나래보다는 진짜...

    그넘의 상상의 나래때문에 더 망가지는거 같아요.....

    좋아하구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냥.... 믿고 따라주는게

    서로 맘편하구 그런듯해요;;;

    그냥 그냥..... 믿는게.........휴;;;;;;;

    (하지만 여자 입장에서 참 힘들어요 이런 부분이 ㅋㅋㅋ)

    1. Re: # 은영 2008년 03월 21일 18시 15분 Delete

      물론 믿지만;;
      세상이 워낙에 험하다보니 ㅠㅠ;

  4. # BlogIcon 앙증맞은 너구리양 2008년 03월 21일 12시 34분 Delete Reply

    언니 언니 말대로 블로그..다시 살려볼까해요 -ㅁ-;;

    볼꺼는 절대 없다는 ㅋㅋㅋ

    좋은 하루 보내세여 ^_^

    1. Re: # 은영 2008년 03월 21일 18시 16분 Delete

      ㅊㅋㅊㅋ해요~
      자주 놀러갈게요~ ㅎㅎ

  5. # 비밀방문자 2008년 03월 22일 23시 58분 Delete Rep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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