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나를 조지려 했다

Posted 2008년 02월 27일 00시 28분, Filed under: 일상

"오늘 나오기 전에 많이 고민했어. 어떻게 하면 너를 조져버릴 수 있을지."
남군이 내게 말했다. 전혀 뜻밖이었다. 그가 나를 '조지기' 위해 그 자리에 나왔을 줄은.


내가 남군을 처음 만난 것은 10년 전 봄. 나는 갓 상경한, 말 그대로 촌년이었다. 서울의 높은 건물과 지하철이 무서웠고 캠퍼스에 득실거리는 수컷들의 냄새가 무서웠던, 파릇파릇한 스무 살 짜리 촌년. 남군은 동아리방에서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수컷들 사이에서 커다란 눈을 지긋이 내리깔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 말수가 적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동아리 활동을 꽤 열심히 했다. 밥 먹고 술 먹는 일을 대부분 동아리 사람들과 함께했고 어쩌다보니 집회에도 나가 그들과 함께 노래하고 춤을 추고 구호도 외치게 되었다. 남군은 그 사람들 속에 언제나 섞여 있었다. 그렇게 세 학기가 지나고 2학년 2학기, 남군과 나는 나란히 동아리 임원이 되었고 두 사람이 함께하는 시간은 더욱 많아졌다. 그 무렵이었을까, 내가 남군에 대해 조금은 특별한 감정을 느끼기 시작했던 것이. 하지만 남군은 나를 달리 생각하는 것 같지 않았고, 더군다나 당시 동아리내 연애는 금기시되고 있었다. 나는 남군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그로부터 세 학기가 더 지나고 2001년, 그해 입학한 01학번 후배가 남군에게 대쉬했다. 뜻밖에도 남군은 그녀의 대쉬를 수락했다. 밝고 귀여운 친구였다. 남군은 저런 스타일을 좋아하는구나, 라고 생각하던 어느 날, 동아리방에 그녀와 나 둘만 있는 틈을 타 슬쩍 물어보았다.
"너는 남군 어디가 좋아?"
그녀는 나를 빤히 쳐다보며 거침없이 대답했다.
"잘생겼잖아요."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나는 적잖이 놀랐다. 그때까지 한 번도 남군이 잘생겼다고는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상대방의 말을 경청할 때면 초롱초롱 빛나는 두 눈망울, 의문이 생길 때면 고개를 갸웃거리거나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턱에 가져다 대는 몸짓, 즐거운 일이 있을 때면 양팔을 좌우로 흔들며 기뻐하는 천진함, 하지만 때론 예리하고 때론 고집스러운 성격. 이런 것들이 나로 하여금 그에 대해 특별한 감정을 느끼게 했던 그만의 매력이었다.
'네가 남군의 이런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면 오래가지 못할 거야'라고, 나는 속으로만 생각했다. 그녀에게 말해줄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은, 내가 남군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들킬까봐 두려웠던 것이 첫 번째, 그리고 두 사람이 오래지 않아 헤어지기를 바랐던 마음이 두 번째, 진짜 이유였다.
동아리 활동이 뜸한 방학이 되자 그녀는 때때로 내게 전화를 걸어 연애상담을 요청해왔다. 언니, 남오빠가 전화를 안 해요. 언니, 남오빠가 전화를 안 받아요. 언니, 남오빠는 나랑 통화하는 게 싫은가봐요. 그리고 늘 덧붙이는 말,
"언니는 남오빠랑 친하니까 남오빠에 대해 잘 알잖아요."
기쁘고도 슬펐던 그 말.

예상대로 두 사람의 연애는 오래가지 못했다. 누가 누구를 찬 건지,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동아리 안에선 소문이 분분했지만 진실은 오리무중. 두 사람 모두 여전히 왕성하게 동아리 활동에 참여하고 있었지만 냉랭한 분위기는 감출 수 없었다. 나는 기뻤다.
남군은 그 이후로 동아리 안에선 연애를 하지 않기로 작심을 했던 모양이다. 믿을 만한 소식통에 따르면, 얼짱에 몸짱이기까지 한 동아리의 한 여인네가 그에게 대쉬를 했으나 무참히 채였다고 하니. 그 소식을 들었을 때도, 내색은 할 수 없었지만, 나는 기뻤다.
그리고 시간은 지나 4학년이 되었고 1년씩 나란히 휴학을 한 탓에 남군과 나는 한 날에 졸업을 하게 되었다. 졸업을 하고 나면 어쩌면 그에게 대쉬해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기대를 안고서 나는 대학원에 진학했고, 그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 했다. 연락이 뜸해졌다.

'Out of sight, out of mind'라 했던가. 신기하게도, 3년 넘게 애를 태웠던 그 마음은 시간이 갈수록 시나브로 잦아들었다. 2005년 여름, 나는 박기도군을 만났고 다음해 겨울, 하던 공부를 잠시 접고 출판사에 취직했다. 그리고 2007년 봄, 동기 모임에서 남군을 다시 만났다. 그는 보험회사에 취직했다고, 3개월간 교육을 받고 7월부터 활동을 시작할 거라고 했다. 나는, 그래 꼭 보험 하나 들어줄게, 라고 약속했다. 그리고 얼마 후 남군을 다시 만났을 때, 나는 그를 백화점으로 끌고 가 넥타이를 사서 선물해주었다. 그것 말고도 필요한 게 많을 텐데. 시계는 있어? 명함지갑은? 뭐든지 그에게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3개월 후 정작 그가 활동을 시작했을 때 나는 백수가 되어 있었다.

남군은 가끔 내게 연락을 해왔다. 나는 여력이 없어 보험에 가입할 수 없었지만 친구 몇 명을 소개해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박기도군이 남군을 만나 무려 3종의 보험에 가입하게 되었다. 남군에 대해 호감은 커녕 질투심마저 느끼고 있었던 박기도군이 웬일이야? 했더니, 아니나다를까, 그 초롱초롱한 눈망울에 호감이 생겼단다. 어허이, 남군의 매력이란.
남군은 그 뒤로도 가끔 내게 연락을 해왔다. 대체로 동기모임에 관한 것들이었다. 남군의 활약으로 말미암아 우리 동기들은 그가 취업하기 전보다 연평균 3, 4배 정도 자주 만나게 되었다. 어허이, 남군의 위력이란.

2주 전, 남군이 내게 또 전화를 했다. 용건은 올해 2월 25일부터 나의 보험연령이 상승한다는 것. 그 말은 즉 슨, 보험연령이 상승하면 보험료가 더 많이 나가게 되니 보험을 들 거면 그전에 결단을 내리라는 것이었다. 나름 프리랜서 활동으로 수입이 조금 생기던 터라 그를 만나보기로 했다. '최대한 저렴하게'라는 단서를 붙여서.
지난주 월요일 오후, 남군을 만났다. 하루 평균 세 명의 고객을 만난다는 그. 예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반짝이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중, 이런 말을 한다.
"이따 저녁에 한 명 더 만나야 하는데, 어떻게 조져야 할지 고민하는 중이야."
그는 '조진다'는 표현을 썼다. 상대방을 말발로 '조져서' 계약서에 서명하게 만든다는, 그쪽 세계의 은어였다. 어이쿠 이놈, 이쪽 사람이 다 되었구나, 하는 대견함을 느끼며 흐뭇해하던 찰라 그가 말했다.
"사실 오늘 나오기 전에도 많이 고민했어. 어떻게 하면 너를 조져버릴 수 있을지."

"시끄럽고, 어디다 서명하면 되는데?"
라고, 나는 화답했다. 지금의 내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의 화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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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02월 27일 00시 28분 2008년 02월 27일 00시 2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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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Lovely your girl 2008년 02월 26일 23시 39분 Delete Reply

    술 한잔 필요했던 이유가 있었구료.
    뭔가 짠하네.^^
    언니의 솔직한 글과 마음이 좋아잉.
    담에 칵테일 오케??^^

    1. Re: # 은영 2008년 02월 27일 08시 40분 Delete

      칵테일 콜콜~ >0<)/

  2. # BlogIcon eggleg.net 2008년 02월 27일 03시 00분 Delete Reply

    그래서 내맘 같지가 않다는거겠죠..은영님 화잇힝!!!
    제가 은영님 글 겁나게 즐겁게 보고 있다는거 아시죠?

    1. Re: # 은영 2008년 02월 27일 09시 06분 Delete

      저도요. 언제나 들러서 응원해주시는 알다리님, 겁나게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거 아시죠? ^^

  3. # BlogIcon 마키디어 2008년 02월 27일 14시 47분 Delete Reply

    10년 전 그 시절이 생생하게 떠오르게 만드는 글이네요. 은영님 글쓰는 재주가 보통이 아니신것 같습니다. 생생한 어휘 구사력에 반해버맀네요. 혹, 작가분이 아니신지?

    1. Re: # 은영 2008년 02월 27일 15시 04분 Delete

      감사합니다 ^^
      작가라고 할만한 처지는 아니에요. 용돈 벌이로 한달에 서너번 자잘한 기사를 쓰고 있기는 하지만요. 본분은 그냥 대학원생이랄까요. ^^;

  4. # BlogIcon 모르쇠 2008년 02월 27일 19시 54분 Delete Reply

    보험회사에 다니시는 친구분이 어떤 분일지도 궁금하지만 어떤 동아리에서 활동하셨던 건지도 궁금하네요. 뭔가 멋진 일을 하셨을 것 같은데..

    1. Re: # 은영 2008년 02월 27일 20시 23분 Delete

      시사만화 동아리였어요. 멋지다기보단 재미있는 곳이었죠. ^^

  5. # 뵹수 2008년 02월 29일 15시 51분 Delete Reply

    남군 이야기 잘 보고 간다.

    파하핫~

    남군 때문에 현금 흐름이 안 좋아 졌어....킁....

    1. Re: # 은영 2008년 02월 29일 16시 01분 Delete

      헐;; 이노므자슥 근무시간에 농땡이냐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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