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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년 02월 20일 백담사 가는 길 (4)

백담사 가는 길

Posted 2008년 02월 20일 15시 41분, Filed under: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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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담사 가는 길 *3


똥 씹은 표정의 전씨가 수많은 기자 사이에 둘러싸여 있는 눈 덮인 사찰. 그것이 내 기억 속에 유일하게 자리하고 있는 백담사의 모습이었다. 어디선가 '당일 코스로 혼자 여행하기 좋은 곳'에 소개된 것을 보긴 했지만, 똥 씹은 전씨의 표정이 먼저 떠올라 가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던 곳.

고전문학 단합대회 장소는 애초에 설악산 대명콘도로 정해져 있었다. 그러다가 불교 좋아하시는 화쟁 선생님의 강력 추천으로, 행선지는 백담사 곁에 있는 만해마을로 바뀌게 되었다. 아침 일찍 서울에서 출발했지만 도착해서 점심을 먹고 보니 시간은 벌써 오후 3시. 이제 어디로 가나 했는데, 역시나 목적지는 백담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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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덮인 내설악 *2


눈이 많이 쌓인 탓에 평소 다니는 셔틀버스는 운행이 중단된 상태. 우리는 왕복 10km가 넘는 거리를 오롯이 걸어갔다. 길은 시멘트로 잘 닦여 있었고 눈은 길 가장자리로 곱게 쓸려 있었다. 평일인데다가 산에 오르기엔 다소 늦은 시간이어서, 간혹 내려오는 사람은 눈에 띄었지만 올라가는 사람은 우리 일행이 전부였다.

사실 백담사 가는 길을 두고 올라간다, 내려간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산 바깥쪽에서부터 시작해 내설악 깊은 곳까지 모퉁이를 빙빙 돌아가야 백담사가 나온다. 평지도 있었고 얕은 오르막도 있었고 때로는 내리막도 있었다. 가는 길과 오는 길이 다르지 않다. 문제는 고도가 아니라 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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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백담사 *3


하지만, 가는 데만 1시간 반이 걸리는 그 길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과 그간 지낸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시간 가는 줄을 몰랐고, 눈 쌓인 내설악의 풍경은 어떤 산수화보다도 아름다웠다. 길이 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화를 하는 데에도 경치를 구경하는 데에도 방해가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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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기념관과 범종루. 곱게 조각한 범종루의 난간. *3


백담사는 큰 절이다. 근간에 지은 듯한 새 건물도 있었다. '템플 스테이'를 광고하는 현수막도 걸려 있었다. 한쪽에는 만해 기념관이 있었고, 전씨가 묶었던 방도 보존되어 있었다. 우리는 매점에 들어가서 대추차로 몸을 녹이며 난로 가에 앉아 이야기도 하고 기념품 구경도 했다. 하지만, 곧 해가 기울 시간이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지체할 수는 없었다.

절 문을 나서자 해는 그늘만 남겨놓고 우리보다 한발 앞서 서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저쪽 산 모퉁이만 돌면 볕에 닿을 수 있을 것만 같아 걸음을 서둘러보아도 좀처럼 따라잡을 수 없었다. 볕이 없는 겨울 산은 몹시 추웠다. 구멍 난 내복이 창피해 바지 한 장만 덜렁 입고 나온 게 후회스러웠다. 장갑을 끼고 있었지만 손이 시렸고, 모자를 쓰고 있었지만 귀가 시렸다. 군데군데 찢어진 빈티지 청바지는 차가운 산 공기를 내 다리에 고스란히 전달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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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쌓인 얼음 장막 아래로 계곡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4


송어회로 저녁을 먹고 숙소인 만해마을로 들어갔다. 아마도 수련관 비슷한 곳이리라 생각했는데 콘도와 비슷한 구조로 만들어진 방은 뜻밖에 넓고 깨끗했다. 짐을 풀고 둘러앉았다. 화쟁 선생님이 폭탄주를 제조해 돌리셨다. 나는 폭탄주 2잔을 마시고 곯아떨어졌다. 다음날 아침 알게 된 사실이지만, 옆에 앉아 계시던 지도교수의 어깨에 살포시 기대 잠들어 있었다. 억울하게도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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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동판에 새겨 장식한 담벼락. 아쉽게도 만해의 시는 아니었다. *2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혼자 산책을 했다. 만해마을의 건물들은 출판단지의 기하학적인 건물들과 비슷했다. 깔끔하게 정돈된, 하지만 결코 지루하지 않은 느낌.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데 멀리서 교수님들과 몇몇 선생님들이 짐을 싸서 나오신다. 바쁜 일이 있어 먼저 가시는 거라고. 서운한 마음이 없지 않았으나 사실, 교수님들이 아니 계셔야 우리가 놀기에 편하다.

8시, 식당에서 준비된 식사를 하고 나니 2층 다실에 들러서 차를 마시라고 직원이 말해준다. 식사 후 커피까지 마신 뒤라 큰 기대는 하지 않고 그냥 올라가 봤는데 상상 이상이었다. 정갈하고도 아기자기하게 장식된 실내엔 조용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우리가 자리를 잡고 앉자 인상 좋은 팽주가 세작을 세 번까지 우려 찻잔에 직접 따라주었다. 간단한 다도에 대해서도 알려주며, 만해마을 다실은 언제나 무료이니 다음에 지나갈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들르라고 한다. 나는 혼자서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다시 한번 꼭 오고 싶은 곳이라고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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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갈하고도 세련된 만해마을의 다실 *4


여기까지 온 김에 속초에 들러 바다라도 한번 보고 가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정체가 시작되기 전에 출발해야 한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아, 우리는 결국 두 팀으로 찢어졌다. 나는 서울로 곧장 오는 것을 택했다. 할 일이 많았고, 피곤했다. 뻑적지근한 일상으로 돌아오는 길은 갈 때만큼 즐겁지 않다. 일상이란 늘 그런 것이지.

언제고 다시 어딘가로 떠나고 싶어진다면, 나는 백담사로 가는 눈 덮인 길을 떠올릴 것이다. 지금 내 기억 속의 백담사는 그런 모습으로 새롭게 각인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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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02월 20일 15시 41분 2008년 02월 20일 15시 4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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