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라서 힘든 거다
Posted 2008년 04월 05일 15시 47분, Filed under: 생각유치원 졸업사진엔 내가 없다. 화장실에 다녀오는 사이 사진 촬영이 끝나버렸기 때문이다. 자리를 뜰 때 옆에 서 있던 친구에게 얘기를 해두었으나 불행히도 나의 그런 사정은 사진 기사에게 정확하게 전달되지 못했고, 그 때문에 어린 시절의 사진을 모아둔 앨범의 첫장을 당당하게 차지하고 있는 8R 크기의 유치원 졸업사진에는 내가 없다.
간식시간이 되면 아이들은 양손을 한쪽 뺨에 얌전히 모으고 앉아서 눈을 감는다. 선생님은 피아노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며 아이들 주위를 돌아다니면서 아이들의 머리에 임의의 순서대로 손을 얹어준다. 선생님의 손이 닿은 아이들은 그제서야 일어나 간식이 준비되어 있는 방으로 달려간다. 하루는 그렇게 앉아서 선생님의 손길을(간식을) 기다리고 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내 머리에는 손을 얹어주지 않는 것이었다. 모든 아이들이 간식을 먹으러 간 뒤에야 비로소 내 차례가 되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내 머리에 다정하게 손을 얹어주는 대신 매섭게 질책했다.
"너 왜 실눈 떴니."
아이들은 햇님반과 달님반으로 나눠졌는데 나는 햇님반이었다. 햇님반과 달님반은 교실도 따로 쓰고 담당 선생님도 달랐지만 한달에 한 번 생일잔치를 할 때는 햇님반 교실과 달님반 교실에서 번갈아가며 모두 모였다. 내 생일이 들어있는 9월엔 달님반 교실에서 생일잔치를 했다. 종이로 만든 왕관을 쓰고 과자를 엮어 만든 목걸이를 걸고 부모님과 선생님들 앞에서 춤도 추고 노래도 하고 나서 드디어 음식이 차려져 있는 자리에 앉았는데 달님반 선생님이 하는 말.
"햇님반은 너네 교실로 가야지."
잔치만 같이 하고 밥은 따로 먹는다는 것을 왜 나만 몰랐을까.
유치원에선 특별한 날이 아니어도 가끔 사진 기사가 와서 아이들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미끄럼틀을 타는 모습을 찍기도 하고 유치원 마당에 그냥 세워놓고 찍기도 했다. 한번은 잔디밭에 앉아서 사진을 찍었는데 언니가 그 사진을 보고 나에게 물었다.
"근데 너 뭐하고 있는 거야?"
그때까지만 해도 소풍을 가거나, 해수욕장에 가거나, 운동회를 하는 등 특별한 일이 있어야만 사진을 찍는 걸로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나는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그만 우물거리고 말았다. 그 뒤로도 한참동안 언니는 그 사진을 볼 때마다 나를 놀렸다.
내가 다닌 유치원은 성모유치원이었다. 그래서 매일 5분 정도 성모마리아님께 기도를 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나는 그게 뭔지도 모르고 그냥 열심히 간절하게 성모 마리아님께 한말 또하고 어제 한말 또하고 하는 식의 긴긴 기도를 했었다. 언니는 낙원교회 부속 낙원유치원에 다녔는데 언니도 매일 유치원에서 기도를 했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유치원에서는 모두 당연히 기도를 하는 줄로만 알았다. 우리집은 기독교나 천주교와는 하등의 관련이 없다. 어머니는 불교 신자다.
유치원을 졸업할 때 나는 울었다. 슬퍼서 운 게 아니었다. 졸업식 때는 원래 울어야 하는 거라고 선생님이 그랬다. 그럴듯한 이유를 장황하게 들어가면서. 그 말을 듣자 곧 울음이 터져나왔고 나를 비롯한 몇몇 아이들은 정말로 구슬프게 한참을 울었었다. 그리고 얼마 후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초등학교에서는 2교시가 끝나면 항상 운동장에 나가 중간체조를 했다. 온 교실의 아이들이 줄을 맞춰 운동장으로 나가고 들어오는 사이 다른 반 아이들과도 자연스레 마주치게 되는데, 한번은 낯이 익은 듯한 다른 반의 남자아이가 나에게 물었다.
"너 성모유치원 나왔지?"
유치원 동창이라니, 나는 반가운 마음에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 남자아이는 웃음이 만연한 얼굴로 나를 가리키며 주위 친구들에게 말했다.
"쟤, 유치원 졸업식 때 울었어."
나는 잔뜩 무안해져서 그놈을 한대 패주고 싶은 기분이 들었지만, 복도에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줄에 밀려가느라 어찌 해볼 도리가 없었다. 그 뒤로도 몇 번이나 놈은 나를 만날 때마다 "너 성모유치원 나왔지?"라고 물었고 나는 그놈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고 또다시 "응" 이라고 대답했고 그러면 그놈은 기고만장하게 웃으며 "재, 유치원 졸업식 때 울었어" 라고 주위 친구들에게 말했고 그러면 나는 다시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까지 나는 그놈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해 그런 식의 대화를 되풀이하는 과오를 저질렀고 그 때문에 매번 창피를 당해야만 했다.
어린 시절에 받은 상처들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왜 그때 제대로 말을 하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가 막심하다. 내가 제대로 대응했더라면 상처 받지 않고 그 상황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을 텐데. 세상을 대하는 데 너무나 미숙해서 내 입장을 분명히 전달하지 못하고 바보같이 당하기만 했던 것 같다. 따지고 보면 어린 시절의 이런 상처쯤 누구든지 하나씩은 갖고 있을 것이다. 아이들은 세상에 대해 무지할 수밖에 없다. 모든 일에 서툴고, 그래서 실수하고, 그래서 상처를 받는다.
"그래도 학생 때가 편한 줄 알아라"는 말, 도대체 뭐가 편하다는 건가? 자식을 키우고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어른들의 무거운 어깨를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도 고민이 있고 갈등이 있다. 다만 경제활동을 하지 않고 부모에게 얹혀 산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말을 들어야 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어른이 되어 부딪히는 '사회'는 어릴 때 나를 괴롭히던 '세상'보다 훨씬 가혹하지만, 이제는 어른이기 때문에 그런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위기를 만났을 때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스스로 방법을 찾을 수 있다. 삶에 대한 아무런 노하우도 없는 어린이들의 처지를 거기에 비교해서는 안 된다.
난 지금도 세상 사는 데 서툴고 할말을 제때 못해 손해를 보기도 하지만, 그래도 어릴 때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최소한 내 의지로 내 삶을 꾸려나가고 있으니까.
가끔 어린 아이들이 부럽기도 하다. 미래에 대한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것만으로도 어린 아이들은 부러운 존재다. 하지만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지금도 꿈을 꾸기에는 늦지 않았고 이만큼 성장하기 까지 겪은 고통을 다시 경험하고 싶지는 않기 때문에.
간식시간이 되면 아이들은 양손을 한쪽 뺨에 얌전히 모으고 앉아서 눈을 감는다. 선생님은 피아노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며 아이들 주위를 돌아다니면서 아이들의 머리에 임의의 순서대로 손을 얹어준다. 선생님의 손이 닿은 아이들은 그제서야 일어나 간식이 준비되어 있는 방으로 달려간다. 하루는 그렇게 앉아서 선생님의 손길을(간식을) 기다리고 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내 머리에는 손을 얹어주지 않는 것이었다. 모든 아이들이 간식을 먹으러 간 뒤에야 비로소 내 차례가 되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내 머리에 다정하게 손을 얹어주는 대신 매섭게 질책했다.
"너 왜 실눈 떴니."
아이들은 햇님반과 달님반으로 나눠졌는데 나는 햇님반이었다. 햇님반과 달님반은 교실도 따로 쓰고 담당 선생님도 달랐지만 한달에 한 번 생일잔치를 할 때는 햇님반 교실과 달님반 교실에서 번갈아가며 모두 모였다. 내 생일이 들어있는 9월엔 달님반 교실에서 생일잔치를 했다. 종이로 만든 왕관을 쓰고 과자를 엮어 만든 목걸이를 걸고 부모님과 선생님들 앞에서 춤도 추고 노래도 하고 나서 드디어 음식이 차려져 있는 자리에 앉았는데 달님반 선생님이 하는 말.
"햇님반은 너네 교실로 가야지."
잔치만 같이 하고 밥은 따로 먹는다는 것을 왜 나만 몰랐을까.
유치원에선 특별한 날이 아니어도 가끔 사진 기사가 와서 아이들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미끄럼틀을 타는 모습을 찍기도 하고 유치원 마당에 그냥 세워놓고 찍기도 했다. 한번은 잔디밭에 앉아서 사진을 찍었는데 언니가 그 사진을 보고 나에게 물었다.
"근데 너 뭐하고 있는 거야?"
그때까지만 해도 소풍을 가거나, 해수욕장에 가거나, 운동회를 하는 등 특별한 일이 있어야만 사진을 찍는 걸로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나는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그만 우물거리고 말았다. 그 뒤로도 한참동안 언니는 그 사진을 볼 때마다 나를 놀렸다.
내가 다닌 유치원은 성모유치원이었다. 그래서 매일 5분 정도 성모마리아님께 기도를 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나는 그게 뭔지도 모르고 그냥 열심히 간절하게 성모 마리아님께 한말 또하고 어제 한말 또하고 하는 식의 긴긴 기도를 했었다. 언니는 낙원교회 부속 낙원유치원에 다녔는데 언니도 매일 유치원에서 기도를 했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유치원에서는 모두 당연히 기도를 하는 줄로만 알았다. 우리집은 기독교나 천주교와는 하등의 관련이 없다. 어머니는 불교 신자다.
유치원을 졸업할 때 나는 울었다. 슬퍼서 운 게 아니었다. 졸업식 때는 원래 울어야 하는 거라고 선생님이 그랬다. 그럴듯한 이유를 장황하게 들어가면서. 그 말을 듣자 곧 울음이 터져나왔고 나를 비롯한 몇몇 아이들은 정말로 구슬프게 한참을 울었었다. 그리고 얼마 후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초등학교에서는 2교시가 끝나면 항상 운동장에 나가 중간체조를 했다. 온 교실의 아이들이 줄을 맞춰 운동장으로 나가고 들어오는 사이 다른 반 아이들과도 자연스레 마주치게 되는데, 한번은 낯이 익은 듯한 다른 반의 남자아이가 나에게 물었다.
"너 성모유치원 나왔지?"
유치원 동창이라니, 나는 반가운 마음에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 남자아이는 웃음이 만연한 얼굴로 나를 가리키며 주위 친구들에게 말했다.
"쟤, 유치원 졸업식 때 울었어."
나는 잔뜩 무안해져서 그놈을 한대 패주고 싶은 기분이 들었지만, 복도에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줄에 밀려가느라 어찌 해볼 도리가 없었다. 그 뒤로도 몇 번이나 놈은 나를 만날 때마다 "너 성모유치원 나왔지?"라고 물었고 나는 그놈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고 또다시 "응" 이라고 대답했고 그러면 그놈은 기고만장하게 웃으며 "재, 유치원 졸업식 때 울었어" 라고 주위 친구들에게 말했고 그러면 나는 다시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까지 나는 그놈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해 그런 식의 대화를 되풀이하는 과오를 저질렀고 그 때문에 매번 창피를 당해야만 했다.
어린 시절에 받은 상처들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왜 그때 제대로 말을 하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가 막심하다. 내가 제대로 대응했더라면 상처 받지 않고 그 상황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을 텐데. 세상을 대하는 데 너무나 미숙해서 내 입장을 분명히 전달하지 못하고 바보같이 당하기만 했던 것 같다. 따지고 보면 어린 시절의 이런 상처쯤 누구든지 하나씩은 갖고 있을 것이다. 아이들은 세상에 대해 무지할 수밖에 없다. 모든 일에 서툴고, 그래서 실수하고, 그래서 상처를 받는다.
"그래도 학생 때가 편한 줄 알아라"는 말, 도대체 뭐가 편하다는 건가? 자식을 키우고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어른들의 무거운 어깨를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도 고민이 있고 갈등이 있다. 다만 경제활동을 하지 않고 부모에게 얹혀 산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말을 들어야 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어른이 되어 부딪히는 '사회'는 어릴 때 나를 괴롭히던 '세상'보다 훨씬 가혹하지만, 이제는 어른이기 때문에 그런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위기를 만났을 때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스스로 방법을 찾을 수 있다. 삶에 대한 아무런 노하우도 없는 어린이들의 처지를 거기에 비교해서는 안 된다.
난 지금도 세상 사는 데 서툴고 할말을 제때 못해 손해를 보기도 하지만, 그래도 어릴 때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최소한 내 의지로 내 삶을 꾸려나가고 있으니까.
가끔 어린 아이들이 부럽기도 하다. 미래에 대한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것만으로도 어린 아이들은 부러운 존재다. 하지만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지금도 꿈을 꾸기에는 늦지 않았고 이만큼 성장하기 까지 겪은 고통을 다시 경험하고 싶지는 않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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