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만 행복해서 죄송합니다
Posted 2008년 10월 29일 20시 21분, Filed under: 생각또 밤을 샜다. 논문과는 하등의 관련이 없는 웹서핑을 하다보니 시간이 그렇게 되더라. 그렇다, 바야흐로 논문시즌이 돌아온 것이다. 3년 전부터 쓰다말다를 반복했던 지루한 논문을, 이번에는 꼭 좀 써보자고 발악 중인데, 웹서핑으로 날밤 새는 거이 왠말인지.
라면이 떨어져서 밥을 했다. 계란도 없고 국거리도 없고, 사다 만들어 먹기는 커녕 반찬 꺼내기도 귀찮아서 맨밥에 간장 비벼서 대충 때웠다. 결국 체했다. 소화제를 먹었다. 오후에는 소중하고 귀중한 비공개 자료(+_+)를 입수하러 ㄱ대학에 가기로 약속이 잡혀 있었다. 나가기 전에 출출해서 이번에는 꼴뚜기젓에 비벼서 대충 때웠다. 또 체했다. 체기를 느꼈을 때는 이미 버스 안이었다.
ㄱ대학의 ㅈ교수님은 혼자서만 보라고 하시며 선뜻 자료를 내어주셨다. 문과대학 나가서 왼쪽으로 가다보면 '정경대 후문'이 나오는데, 그 바로 앞에 복사가게가 있다 하셨다. 귀한 시간을 내주신 터라 최대한 빨리 복사를 해오기 위해 헐레벌떡 달렸다. ㄱ대 학생들에게 물어볼까 하다가 사람들이 많이 가는 방향으로 따라가면 후문이 나올 것 같아서 그냥 갔다. 과연 정문이 아닌 다른 문이 나왔다. 그런데 복사가게가 안 보인다. 다시 뛰기 시작했다. 조금 가다보니 전형적인 대학 후문 분위기의 골목이 나타났다. 나는 동물적인 육감으로 그 골목으로 진입, 마침내 복사가게를 발견, 그리고 그 바로 앞에 있는 '정경대 후문'을 발견했다. 복사를 맡겨놓고 기다리는데 속이 쓰렸다. 가뜩이나 소화불량인데다가, 오랜만에 매우 뛰었더니 체내에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면서 가뜩이나 부족한 소화효소 분비를 줄이고 있는 게 분명했다. 기능이 저하된 위장의 괄약근이 위액에 섞인 2008년산 햅쌀밥과 꼴뚜기를 식도로 밀어올리고 있었다.
꾸욱~ 억누르며 신문을 보는 사이 복사가 다 됐다. ㄱ대학 앞 복사가게 아주머니는 손이 좀 더딘 느낌이 없지 않았지만, 그래도 친절해서 좋았다. 우짜둔둥 다시 들고 문과대학으로 뛰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코앞에 있는 '정경대 후문'을 놓치지 않았다. ㅈ교수님께 룰루랄라 자료를 돌려드리고 거듭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린 뒤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ㄱ대에서 우리집까는 2222번 버스를 타면 한 방이다. 그런데 아뿔싸, 아까 내린 곳의 맞은 편 버스 정류장에 2222번이 없었다. 다시 보니 우회전으로 진입해 들어온 교차로가 나갈 땐 좌회전 금지였다. 한 정거장만 걷기로 했다.
버스 정류장을 300미터 가량 지나와서야 깨달았다.
'환승하면 되는 것을!'
돌아가려 하는데 기다리고 있던 신호가 파란색으로 바꼈다. 나는 본능적으로 건널목을 건너고 있었다. 얼마 있지 않아 버스정류장이 나타났다. 2222번은 커녕 우리집 방향으로 가는 버스가 한 대도 없다. 좌절, 다시 걸었다. 햅쌀밥과 꼴뚜기들은 여전히 맹렬한 기세로 식도의 괄약근을 두드려대고 있었다. 침을 꿀꺽 삼키며 억눌렀다. 낯선 길을 10분을 더 걷자 눈에 익은 ㄱ시장 이정표가 나타났다. 그리고 잠시 후 버스정류장을 발견했다. 집에 가는 버스가 아주 많았다. 천만다행.
집에 들어오기 전에 동네 슈퍼에 들렀다. 생수도 사고, 계란도 사고, 황태채도 샀다. 그러고보니 며칠 동안 라면만 먹었다. 오늘은 라면이 떨어져서 맨밥을 우겨넣었던 거고. 맛있는 국을 끓여먹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햅쌀밥과 꼴뚜기들은 이제 십이지장으로 쓸려내려갔는지 조금 잔잔해졌지만, 그들이 남긴 후유증이 여전히 위벽을 긁어대고 있었다. 갑자기 쇠고기를 넣은 미역국이 먹고 싶어졌다. 한 주먹 크기도 안 되는 한우 양지머리 한 덩이가 오천원. 그래도 과감히 질렀다. 지금은 미역국이 담백한 냄새를 풍기며 보글보글 끓고 있는 중이다.
한우 먹는다고 자랑질을 하고 싶었다. 미역을 불리는 사이 고향집에 전화를 걸었다. 엄마가 받았다. 한우 먹는다고 자랑질을 할 수가 없었다. 엄마는 전화를 받자마자 나에게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음력 4월 8일로 하자. 그날이 길일이란다."
음력 4월 8일이면 양력으론 5월 3일. 그렇다면 나는, 5월의 신부가 되는 셈이다. 닐니리야~
언젠가 받았던 청첩장에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저희만 행복해서 죄송합니다."
지금 내가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 네네 한달만에 나타나서 결국은 또 염장이군요 ;-)
